안주하지 않는 미국 시니어들의 일과 삶

_ | 2012/04/19 | 정보나눔


여전히 꿈을 꾸는 청춘, 시니어가 달린다 ②

 


사진출처:flickr, by badoir

하루는 보스턴에서 연구년을 지내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모임을 다녀오시더니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정아, 나 오늘 참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한국 정부기관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떵떵거리면서 지내던 분이 미국에서 새로운 분야를 연구한다며 학교 연구소에서 고생을 하고 있더구나. 한국에서는 매일 아침 직원이 모시러 오고 부하 직원도 수백 명이었을 텐데, 그런 삶을 다 버리고 미국까지 와서 지하철 타고 걸어 다니면서 생고생을 한다더구나. 연구소 일이 만만치 않다던데 오십대 중반이 되어서 그런 일을 한다니 참 신기한 분이지.”

일반적으로 나이 오십을 넘기면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위치에서 그동안 해 왔던 일의 결실과 보상을 바란다. 전통적인 커리어 단계 모델(Super’s Career Stage Model) 이론에서도 50대는 ‘성숙한 단계’라고 하여, 꾸준히 개발한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 시기로 규정한다. 2,30년이 넘어가는 세월 동안 피땀 흘려 일군 직업에서 열매를 맛보고 싶고,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대접받으면서 살고 싶은 시기다.

많은 미국 시니어들도 이와 같은 전통적 커리어 단계 모델을 밟아 간다. 20대 초반에는 직업을 찾아 이쪽저쪽 기웃거리며 탐색과 시행착오의 시기를 거치고 3, 40대에는 자리를 잡고 하나의 커리어를 일궈 가는 성장의 단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40대 후반부터 50대까지는 기존에 갈고 닦은 커리어를 유지하며 정점을 찍고, 60대에 들어서면 커리어 내리막길을 걷는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 수준도 높고 풍족한 삶을 누리며 자란 베이비부머 세대들(미국에서 1946년에서 1964년 사이 출생자)이 50대에 접어들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전통적인 커리어 단계 모델이 아닌 새로운 커리어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얼번 인스티튜트(Urban Institute)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심지어 베이비부머 전 세대 사람들 중에서도 회사도 바꾸고 직종도 바꿔 가며 60대 중후반이 되어서도 일을 하는 시니어들이 있다고 한다.(1992년에 50대 초중반이던 정규직 종사자 중 43%가 60대 중후반이 된 2006년에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회사를 바꾼 사람 중 3분의 2는 직종도 바꿨다고 한다.)

한 회사에서 꾸준히 일을 하는 삶을 선호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우리 사회에서 50대에 접어들어 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미국에서는 노동력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50대 연령층의 다수가 기존의 일터와 직업군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 한다. 심지어 미국 시니어 중에는 50대 초반에 새로운 전문직에 뛰어들고 싶어서 대학에 입학해서 하숙집 생활을 시작한 분도 있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시니어

미국 시니어들이 이와 같이 새 시도를 많이 하는 데에는 늘어난 평균 연령과 직종 및 조직 간의 이동이 유연해진 노동시장도 한 몫을 한다.

하지만 직장과 직종을 바꾸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첫째는 국민연금 지원과 회사 차원의 연금 지원이 약해지면서 재정적인 필요에 의해 보수가 좀 낮은 직장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경우다. 미국 사회는 신용사회로 교육을 받을 때도, 차 하나를 살 때도 부채를 지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 갚아 가는 가계 소비 패턴을 보인다. 재정적 독립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집 구매의 경우 30년 상환 부채가 기본이기 때문에 50대가 되어서도 아직 갚아 나가야 할 부채를 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새 직장을 찾는 미국 시니어들 중에는 이와 같은 생계형 이직 시니어들이 있다.

둘째는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이켜보니 좀 더 의미 있는 방법으로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서 새 길을 찾는 의미지향형 이직 시니어들이다. ‘앙코르 커리어(encore career)’라고도 일컫는 인생의 후반부에서 개인적인 성취감과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 그리고 금전적인 보상도 받는 새로운 직업을 찾는 사람들도 이 그룹에 속한다.(많은 시니어들은 전자와 후자에 다 속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이유로 많은 미국 시니어들은 한 길을 파서 정점에 올라선 후 내리막길에 접어드는 전통적인 패턴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보이는 단계에서 다시 새로운 커리어 사이클을 시작한다.

따라서 시니어 이직자가 많은 미국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퇴직’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더구나 베이비부머의 경우 지금까지 평균 10개 이상의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50대 이후에 겪는 이직은 또 다른 이직의 하나일 뿐 뭔가 색다른 이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특히 베이비부머 중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의 경우 70대 이후까지도 일을 할 것이라 밝히고 있어, 50대 때의 이직은 단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직종, 직장 변경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몇몇 학자들과 인사 실무진들은 ‘퇴직 후 직장(post-retirement job)’이라는 단어, 혹은 10년 이상 일한 커리어에서 은퇴한 후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나가기 전 그 사이를 잇는 일을 한다고 하여 ‘교각 직장(bridge employmen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50대의 이직을 일컫기도 하지만, 많은 시니어들은 시니어가 되어 겪는 이직을 또 다른 이직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끊임없이 활동하는 미국 시니어

물론, 30대에 겪은 이직의 경험과 50대가 넘어서 겪는 이직의 경험은 이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개인적인 일에 대한 태도와 삶의 모습에 따라 시니어가 되어 겪는 이직이 본인과 가족들에게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20대 중반부터 50대 후반까지 한 교육기관에서 한 과목만을 가르친 어떤 시니어는 비록 일터에서 나이가 많아 불리한 점이 있긴 하지만 운전해서 강의실에 가지 못하는 날까지 그 일만을 하겠다고 말한다.

반면 30대부터 20여 년간 컴퓨터 엔지니어링 전공을 바탕으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는 또 다른 시니어는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와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시작한 네일아트 일이 컴퓨터 자판을 긴 세월 두드리며 자신이 얼마나 사람을 그리워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고 한다. 손님들과 대화하면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말한다.

의미지향적 시니어 이직자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 없고, 순전히 재정적인 상황으로 인해 일을 시작하였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부여한 의미에 초점을 두고 일을 하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빛이 난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 혹은 마음을 다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얼굴에서 나오는 빛은 기존의 틀을 벗어났다는 두려움과 새로운 영토에 발을 들여놨다는 어색함을 말끔히 씻어 버린다.

현재 환경친화적 디자인 개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한 시니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디자인을 통해 세상을 바꾸자. 그게 내 목표예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닌 회사만 해도 일곱 개가 되지요. 디자인이 내게 뭘 의미하는지도 계속 바뀌었어요.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예술과 뭐가 다른지, 그 정체성조차도 애매할 무렵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시작해서 회사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처럼 착실하게 회사 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개인적인 이유로 20대 후반에 더 이상 회사의 일부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죠.

그 이후에 디자인 회사, 웹디자인 회사 등을 운영했어요. 헌데 40대 중반쯤 들어서서 했던 일을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이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에 가서 20대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30대 교수들에게 환경친화적 에너지 관련 수업을 들었어요. 하나도 몰랐던 분야를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죠. 그래서 현재 환경친화적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게 된 거예요. 평생 여러 종류의 디자인 회사를 다니고 운영했지만, 이만큼 마음에 와 닿고 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는 생각이 드는 일은 없었어요. 이제야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읊조리던 것이 현실화되었다고나 할까요.”

이 미국 시니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의 즐거움은 자신의 본질을 가장 잘 반영한 의미를 찾는 마음에서, 그리고 인생 후반부에 또 다른 경주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 김나정(보스턴 컬리지 경영학 박사과정)
김나정님은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조직사회심리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미국 보스턴 컬리지 경영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일터에서 다양한 종류의 변화를 겪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박사 논문 주제로 ‘은퇴기 사람들의 새터 적응기 및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고 있다. najung.kim@bc.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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